2002_부활의노래_인터뷰
도대체 누구일까? 지난 5월경, 추모연대 홈페이지를 개설하기 전 임시로 사용하던 커뮤니티 게시판에 낯선 이름 하나가 등장했다. 그리고 그 이름은 한 동안 열사들의 기일을 잊지 않고 찾아와 기일을 맞은 열사의 묘소 사진을 정성스럽게 올려놓았다. 예사롭지 않은 사진들은 그 이름의 주인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켰고 궁금증은 이내 하나의 인연이 되어, 몇 번의 메일을 주고받고 목소리로 조금 친해진 뒤에야 낯선 이름 - 김효산의 실물을 마주하게 되었다.
열사 묘소 사진전을 준비하는 사진가 김효산
"다시는 이런 사진…
찍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주연 추모연대 편집부장
김효산. 현재 부산에서 '새날그리기'라는 사진작업실을 운영하며 간간이 대학에서 학생들도 가르치는 사진가(그는 '사진작가'라는 표현이 잘못된 거라면서 반드시 '사진가'라고 써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전국에 있는 열사 묘소 사진 촬영 중임. 간단하게 정리한 그의 현재 이력이지만 조금만 오래 들여다보면 그가 꽤나 바쁜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다. 짐작대로 사진가 김효산은 매우 바쁜 사람인 모양이어서 몇 번의 인터뷰 무산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열사 묘소 촬영차 서울에 상경한 그의 일과의 틈을 잽싸게 빌어 결국 그를 추모연대 사무실까지 오게 했다.
늦은 저녁, 지친 듯한 표정을 얼굴에 한가득 담고 나타난 그에게 우선 사진촬영부터 요구했다. 그의 얼굴이 나온 이미지 컷이 몇 장 필요했는데 장소를 옮기면 촬영이 힘들어질 것 같아서 숨도 돌리지 못한 그를 모델로 만들어야 했다.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사진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이 '찍히는' 것에 대해선 상당히 난감해 한다. 김효산씨 역시 대놓고 싫은 기색은 아니었지만 어색해하고 불편해하는 것은 비슷했다.
내공이 부족해서 잠시 미뤄둔 '우리들의 이야기'
"일단 밥부터 먹으러 가죠." 약속 시간 보다 조금 늦은 벌로, 아직도 어리둥절해 있는 그를 재촉해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어색한 시간도 잠시, 한눈에도 성격 좋아 보이는 그는 주문한 식사가 채 나오기도 전에, 준비한 질문을 꺼낼 생각도 하기 전에, 이야기 보따리를 술술 풀어놓았다.
"이번에 작업하고 있는 열사 묘소 사진들로 내년 11월에 서울에서 전시를 할거거든요. 그것 때문에 조금 바쁘네요."
전시회를 한다는 소식은 처음 접하는 것이었다. 아직 1년의 시간이 남아있는데 뭘 그리 서두르나 싶었지만 전시장 대관 일정을 잡으려면 지금부터 준비하는 것이 맞단다. 그리고 사진가 김효산의 사진 경력에 중요한 한 줄이 될 이번 전시에 그가 쏟는 애정 역시 남다른 것이었고 또 꽤 오랜 시간동안 준비해왔기에 1년을 앞둔 전시회 준비는 결코 이르지 않았다.
그가 열사 묘소 사진 전시회 준비를 시작한 시간을 따지고 보니 96년도까지 거슬러 갔다. 처음 그로 하여금 열사 묘소 사진을 찍게 만든 것은 그 열사들의 부모님들이었다. 96년 당시 김효산씨는 노래패 희망새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고, 그는 희망새를 따라 유가협 창립 10주년 행사에 갔다가 죽은 자식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어머님, 아버님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때 처음 그분들 뵙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작업, 열사 묘소 사진작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주류 사진가들에게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더 큰 의미는 우리 -운동하는 사람들- 스스로에게 기억하게 해주고 싶었어요. 한 때는 치열하게 새겼으나 살면서 자꾸 잊혀져 가는 것들을 사진으로 꼭 이야기기 하고 싶었어요. 그것이 제가 사진을 하게된 이유이기도 하구요."
86학번인 그는 대부분의 그 세대가 그러하듯 총학생회 선전국장도 하는 등의 '평범한' 운동권 학생이었다. 애시당초 목사가 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갔지만 사회 현실은 그가 목사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결국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고, 대학을 졸업한 그는 직장 생활도 해보고, 이런 저런 일들도 해 봤지만 모두 '내 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방황하던 그가 선택한 일이 바로 사진이다.
"처음 사진을 하고 이거다! 싶었어요. 이거면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겠다, 살면서 이거 하나면 후회 안하고 살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바로 원서 넣고 95학번으로 다시 학교에 들어갔죠."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다 늙어서 사진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던 그는 1년 남짓한 시간동안 세상을 등지고 오로지 사진에만 매달렸다. 그런 그의 시선을 다시 카메라 밖으로 꺼내 준 것은 뉴스기사 한 토막. 96년 당시 정세와 관련된 기사였는데, 기사를 접하고 그는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싶어 부산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 물었는데, 그 친구가 다름 아닌 희망새의 단원이었다. 친구와의 우연한 재회를 계기로 그는 희망새와 거의 같이 살다시피 하면서 '희망새를 찍는 사진가'가 된다. 잠시 잊고 있던 '우리들의 모습'을 희망새를 통해 찾은 것이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희망새 촬영 중 알게 된 유가협 부모님들을 통해 열사들의 이야기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꼭 하긴 해야겠는데 쉽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당분간 보류시키기로 했어요. 가장 큰 이유는 저의 '내공'이 부족해서였어요. 다른 작업을 진행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늘 이 작업을 염두에 두었죠. 그러다가 민주공원묘역이 추진 중이라는 이야길 들었어요.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열사 묘역을 한 곳으로 모은다는데 그렇게 되면 기존에 있던 묘소들을 하루라도 빨리 찍어 놔야 하겠더라구요. 그래서 서둘러 작업을 시작한거죠."
그가 마음속으로만 그리던 작업을 시작한 것은 올해 2월 초. 물론 그간 '내공'이 쌓인 것도 그가 다시 작업을 시작하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세 번의 개인전을 하는 동안 자신감도 생겼고 어느 정도 이름도 알렸다. 제도권 안에서, 형식을 갖추어 자기기반을 만들어 놓는 것이 전술상 '우리 이야기'를 하는 데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 우리는 자꾸만 잊고 사는가?"
여기서 잠시 그의 세 번째 전시회 <이/땅/에>을 한 번 둘러보자.
이전의 전시회와는 조금 다르게 <이/땅/에> 전에서는 아주 아름다운 풍경사진들이 주류를 이루는데, 여기에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사진공부를 하기 위해 잠시 부산을 떠나 대구에 머무르던 시절, 그는 '성공하기 전에는 절대로 부산에 돌아가지 않는다.'라는 굳은 다짐을 하였다. 하지만 그리움이란 것이 어디 '굳은 다짐'만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것이겠는가. 결국 그는 3개월을 채 넘기지 못하고 다시 부산을 찾았다. 구체적 사유는 '바다가 보고싶어 미칠 것 같아서.'
5-6년 전쯤이었다.
사진공부를 하기 위해 다른 지방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그땐 왜 그렇게도 답답하고 힘들었던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났었는데...
바다가 보고 싶었다.
기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리던 순간,
코끝에 묻어온 바다냄새는 지쳐 방황하는 내게 위로와 평안을 주었으며, 큰 힘으로 다가왔다.
이 작업은 그때의 그 감정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내 사진을 보는 이로 하여금 내가 느꼈던 위로와 평안을 함께 하고 싶고,
이 작업을 통해 미쳐 보지 못한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되짚어보고 싶다.
<이/땅/에> 작업노트 中
"실제로 보면 별 것 없지만 내게는 참 소중하고 아름다운 땅임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우리가 이토록 아름다운 땅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곧잘 잊어버리죠. 매일 보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멋있고 아름다운지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왜 우리는 자꾸만 잊고 사는가?' - 그가 <이/땅/에>전에서 던진 화두는 이후 작업, 즉 열사 묘소 촬영 작업으로도 이어진다. 이토록 아름다운 우리 땅을 지키는 사람들, 지키다가 먼저 떠난 사람들, 아직도 지키고 있는 사람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사진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그가 이번 작업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지금 하고 있는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끝내면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할 계획인데 그 구체적 대상은 386세대이다. 386세대라고 해서 아무나 그의 모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았고, 현재까지도 10년 이상 한길을 걸어오는 사람들"이어야만 자격이 주어진다. 그는 이 두 가지의 작업을 평생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할 일이고,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임을 단호하게 말한다. "나, 김효산이 아니면 안 된다."고 이 단호한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궁금했는데, 한 때 목사를 꿈꾸었던 사람답게 그는 '기독교적인 신앙'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역할이 아닐까 생각해요. 착실한(?) 신자는 아니지만, 하나님에 대한 내 믿음은 아주 오래된 것이에요. 그래서 그 믿음을 내가 믿고, 그렇기 때문에 그 먼 거리를 늘 기쁜 마음으로 달려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착한 사람 김효산'
지금까지 그는 마석 모란공원 열사묘역과 망월동 민주묘역, 부산 솥발산 공원묘역, 대구 현대공원 등 열사 분들이 많이 안장되어 있는 묘역마다 발걸음을 했고, 그 곳에 있는 열사 묘소는 거의 다 카메라에 담았다. 그 외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열사 분들의 묘소 촬영은 여러 가지 여건 상 솔직히 너무 힘든 일이라고 토로했다.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민족민주 열사는 330분이 넘는데, 이중 위에 열거한 묘역에 안장되신 분들은 120여 분 정도이고, 그 나머지 열사 분들은 개별적으로 안장되었거나 묘가 없는 분들이다. 사실 이 모든 분들을 죄다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겠다는 발상은 조금 무모한 것일 수도 있었다. 재정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충분한 여건이 마련되어 몇 달 동안 이 일에만 매달린다면 모를까.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개인적으로 작업실도 운영하는 그에게는 조금 무리일 거라 여겨졌다. 그런데도 그는 묘소가 없는 분들은 어쩔 수 없더라 해도 나머지 분들은 가묘나 추모비라도 찍고 싶다면서 그 나머지 열사 분들을 떠올리며 너무나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감정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었다. 좋은 것을 말할 땐 표정이 한없이 밝아졌고, 속상한 일을 이야기할 땐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작업에 대한 남다른 열정도 그렇고, 대화 도중 언뜻 언뜻 묻어나는 순수한 심성 등을 종합하여 '이 사람 정말 착하구나'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와 같은 결론에 증거라도 들이밀 듯 '착한 사람 김효산'은, 작업을 준비하기 위하여 작년 11월경부터 올해 3월까지 열사들과 관련된 책 한 권 분량의 각종 자료들을 모으고 정리하면서 '엄청나게' 많이 울었다고 고백했다. 오히려 사진 작업을 할 때는 울지 않았지만 열사들의 유서나 일기, 추모의 글 등을 읽으면서, 또 영화 <민들레>를 보면서 도저히 울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가 눈물을 흘린 일이 비단 이것뿐일까.
한번은 마석 모란공원을 찾았다가 그는 우연히 김처칠 열사의 어머님을 만났다. 사진을 다 찍고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 그에게 왠 할머니 한 분이 오셔서 말을 건네셨는데 그 분이 바로 김처칠 열사의 어머님이셨던 것.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머님이 왠지 오늘은 꼭 오고 싶었다고, 몸이 좋지 않아 안 오려고 했는데 왠지 오고 싶어져서 오셨다면서 그에게 아들 같다는 말씀과 귀한 손님인데 그냥 보내면 안된다고 하시고는 밥을 사주셨다고 한다. 그는 돌아오는 길 내내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닦아야 했다.
"어머님 다리가 불편하신 것 같았어요. 그런데도 2-3일에 한 번씩은 꼭 오신다고 하시더라구요. 당신 아들자리만 살피시는 게 아니라 주위 다른 열사 분들 자리도 다니시면서 '니도 한 잔 해라, 니도, 니도...' 하시면서 소주잔을 부으셨어요. 어머님 말씀이, 이렇게 사는 것도 재미있다고, 내 아들은 가고 없지만 여기 또 (너 같은)아들이 있지 않느냐고..."
그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이 일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고 꼽았다.
물론 그가 열사 묘소 사진을 촬영하면서 늘 감동스런 일들만 있던 건 아니었다. 그는 제대로 관리가 되어 있지 않은 묘소를 찾을 때면 화가 치밀곤 한다고 했는데 그보다 더 그를 화나게 하는 건 열사 묘역을 방문한 일부 사람들의 태도이다. 틈날 때마다 망월동을 찾는다는 그의 전언에 의하면, 이제는 거의 관광지화 되어 있는 망월동 신묘역에 '관광차' 방문했다가 '지나는 길에' 잠시 들린 것 마냥 별 생각 없이 구묘역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가 직접 목격한 것 중 가장 나쁜 사례는 과거 대학 다닐 때 운동권과 친했거나 취미로 운동을 했던 것이 분명해 보이는 '젊은 놈' 하나가 제자 뻘쯤 돼 보이는 애들을 데리고 와서 '내가 옛날에 이재호랑 친했는데...' 어쩌구 하며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엉망으로 부르는 광경이었다.
"어휴, 정말 돌겠더라구요. 그런 경험이 몇 번 있는데, 사진 찍다가 그런 놈들 보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요. 10년 전만 같아도 그 근처에는 발도 못 디딜 놈들이 세월 좀 좋아졌다고 설치는 걸 보면 정말 화가 나요. 그런 놈들은 열사 묘역 같은데 못 들어오게 했으면 좋겠어요. 제도적으로 무슨 수를 쓰던가, 아이디 카드 같은 걸 발급하든지 해서라도 얼씬도 못하게 해야 해요."
"'노력하는 사진가' 소리 듣는 것이 꿈"
이렇게 감정의 흐름도 비교적 선명하고, 자기 주관이 분명한 그였지만 정작 사진에선 그의 감정이 배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감상을 조심스럽게 전하고, 일부러 그렇게 찍은 것이냐고 물으니 그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면서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이럴 경우는 대개 질문을 한 사람이 더욱 당황하는 법.
"그러니까, 애써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부를 때도 감정을 격하게 실어서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건조하게 절대음감을 중요시하며 부르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영화 <민들레>를 봤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다시 말하자면, 작가의 감정, 내지는 연출을 과도하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표현만으로도 그 의도는 충분히 읽힌다라는 것이죠."
서로의 당황스러움을 해소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처음의 감상을 아주 어렵게 설명했다. 그러니 그도 조금씩 인정을 하고 부연 설명을 한다.
"음... 그런 부분이 있긴 해요. 제 감정을 많이 담고 싶지는 않았어요. 담기는 담되, 내가 울고 분노하는 등의 적나라한 감정 그대로를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죠. 다큐멘터리 요소 중에 사실적인 전달이란 부분도 간과할 순 없는데 너무 내 감정대로 흘러가 버리면 이건 다큐가 아니다, 어느 정도 감정을 배제하면서도 또 보도사진과도 차별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내 감정의 수위를 적절히 조절해서 담아내는 것이 다큐멘터리가 아닐까 해요. 그래도 물론 작가의 의도를 상당 부분 깔아야 하죠. 예를 들어, 제가 의도했던 건 죽은 사람의 이야기만 하자는 건 아니었거든요. 수석이 사진을 보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이기도 한데, 수석이의 영정사진과 묘소 날적이가 한 프레임에 담겨 있어요. 즉, 이런 식으로 죽은 자들의 흔적 속에 산 자들의 이야기까지 포함시키자는 것이죠."
그는 '우리의 이야기'를 최대한 혹은 최소한 담담하게 전달하고자 애썼다고 전한다. 흑백사진에서 아주 강한 느낌을 전달하고 싶을 때는 검은색과 흰색이 많아진다고 하는데 그의 사진 톤은 주로 회색계열로, 역시나 담담한 느낌을 전달하는데 한몫 한다. 전시회를 준비하는 그의 마음도 비슷했다.
그는 사진을 보고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은 건 아니라고 했다. 이런 일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저 '아, 이런 사람도 있었구나', '이런 죽음도 있었구나' 하는 정도만이라도 알아준다면 굉장히 큰 성과라고 생각한단다. 다만, 그는 앞서 언급했던 '우리'라는 범주에 있는 사람들이 좀 더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그의 유일한 욕심일런지도 몰랐다.
욕심이 적은 사람은 작은 일에도 만족할 줄 알고, 따라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많이 행복할 수 있다. 그는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인 것 같았다. 그 스스로가 말하는 욕심이라는 것도, 다른 말로 바램이나 꿈 같은 것도 아주 담백하고 소박하다.
"제 꿈은... 음, 조금 어려운데... 저는 세계적인 사진가가 될 생각은 없고 그저 '노력하는 사진가', '노력하는 놈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그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저 친구 사진은 좀 안되어도 정말 열심히 하는 놈이다, 이런 이야기 들으면 행복할 것 같아요."
여기서 그가 조금 더 욕심을 부리는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다시는 이런 사진을 찍지 않는 것"이다. 다시는 이런 죽음이 없었으면, 그래서 열사 명단에 새로운 이름이 추가되고, 자료집을 새로 만드는 일들이 없었으면 하는 게 그가 부리는 '욕심'이고, 그가 말하는 '꿈'이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또 다시 눈물을 흘린다...
늘 다음작업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사진가
사진을 시작한 지 8, 9년이 지났지만 한 번도 힘들다거나 재미없다고 여긴 적이 없는 사람. 사진을 하게 된 것을 크나큰 복으로 알고, 사진으로 변혁운동에 복무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이야기는 하는 사진의 매력은 이렇다.
"꼭 사진의 매력이라기 보단 예술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 내 손을 거쳐서 뭔가가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것, 그 자체가 일단은 가장 큰 매력이에요.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서 남들이 보지 못한 걸 내가 본다거나, 똑같이 본 것이라도 내가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 그게 굉장한 매력이죠. 더 큰 매력은 암실에서 일어나는 일들.. 하얀 인화지가 필름 끼우고 빛을 준 다음에, 약품 안에 들어가니까 그 위에 무언가가 나타나는 데, 그 때의 그 짜릿한 느낌은 사진 하는 사람이라면 다 느낄겁니다. 분명히 조금 전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약품에 들어가니까 상이 그려지면서 윤곽이 잡혀가요. 길지 않은 시간- 10, 15초- 동안 희열을 느끼는 거죠. 이건 처음 사진을 배웠을 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느낌이에요. 다른 매체가 가지지 못하는 매력이기도 하구요."
이렇게 좋아하는 사진을 하고 있으니, 그에게는 늘 다음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작업을 하나 끝내고, 전시회까지 마친 뒤 그는 '다음에는 뭘 하지?' 따위의 고민은 하지 않는다. 해야할 이야기가 너무 많고 하고 싶은 작업이 아직도 많아 그는 쉽게 지치지도 않는다. 어떻게 하면 사진을 잘 찍느냐는 무식한 질문을 던졌더니, 그는 아주 냉정하게 "잘 찍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찍느냐가 중요하다."며 진한 충고를 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 무엇은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주저 없이 말한다. 사진가 김효산이 말하는 '우리'라는 범주에 들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앞으로 긴장하고 살아야 할 것 같다. 언제 어디서, 당신의 삶 언저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의 카메라와 마주칠지 모르는 일이니까.
인터뷰가 끝날 즈음,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몇 번 눈물을 보인 것이 쑥스러웠는지, 누가 '저 사람 왜 저렇게 울었냐?'고 묻거든 이렇게 말해 달란다. 특유의 정겨운 부산 사투리로.
"니가 한번 해바라. 이거 하면서 안 울면 니가 이상한 기다. 진짜로 매일 밤 눈물로 지새워도 모지랄 기다."
<이 글은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에서 발행하는 '열사회보'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