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산 사진/2007_잊혀진이름

2007_잊혀진이름_05

이땅에 2009. 5. 24. 21:53

 

 

 

오다야마묘지(小田山墓地)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福岡県 北九州市)

 

1945년 일본의 패전에 의해 해방된 많은 조선인들은 귀국을 시작하지만, 귀환 업무의 미비로 귀국선을 타는 일은 힘든 것이었다.

 

1945년 9월 17일 와카마츠항에서 일단의 조선인들이 60t 정도의 목선을 타고 귀국길에 올랐으나 때마침 이 지역에는 초특급인 마쿠라자키 태풍이 강타하고 있었다. 큰 선박도 항해를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오직 고국에 돌아가려는 일념으로 이들은 출항을 강행했다.

 

태풍이 휩쓸고 간 9월 18일, 작은 항구도시인 이 마을 앞바다에 100여구가 넘는 시체들이 밀려왔다. 시체는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계속 떠밀려 왔다. 하지만 탑승자가 몇 명인지, 탑승자가 누구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시체는 대부분 해안가에서 묻거나 화장을 했다. 그중 80여구의 시체가 리어카에 실려 이곳 오다야마묘지에 옮겨졌다.

 

오다야마묘지는 오랜 세월동안 거칠게 방치되어 있었으나 1981년부터 시작된 시민운동에 의해 1990년 12월에 위령비가 세워졌으며, 2006년에는 부산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에 의해 부산 민주공원과 이곳에 서로 마주보는 솟대를 세워 이들을 영혼을 위로 하고 있다.

 

 

휴가묘지(日向墓地)

후쿠오카현 타가와시(福岡県 田川市)

 

이곳에는 대리석으로 웅장하게 지어진 일본인 묘지 사이에 조선인 유골 37구가 잡풀 속에 묻혀 있다.

 

조선인이 이곳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표시라고는 탄광에서 나온 지름 20-30㎝ 정도의 보타(석탄과 함께 반출된 암석)가 전부다. 비명도 날짜도 연령도 새기지 못하는 거친 표면의 보타는 묘라하기보다 죽은 사람을 매장한 표시일뿐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주변에 개와 고양이 등 애완동물 무덤들이 들어서면서 한데 뒤섞여 버렸고, 동포들이 잠든 그 자리가 개와 고양이의 묘지로 바뀌면서 흔적을 잃어가고 있다.

 

 

영생원(永生園)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福岡県 北九州市)

 

영생원은 강제연행 문제와 재일동포의 인권운동에 헌신해온 고 최창화 목사와 고쿠라교회에 의해 건립되어졌는데, 1974년 한 사찰에 밀감상자 같은 허름한 곳에 조선인 강제연행 희생자들의 유골이 방치되어 있는 것이 고 최창화 목사에 의해 발견되었고 흩어진 유골을 수습해 납골당을 세우고 안치했다.

 

당시 170여구의 유골을 인수 받았지만, 확인된 유골은 유족에게 반환하고, 현재는 신원을 알 수 없거나, 유가족을 찾지 못한 80여구의 유골과 고쿠라교회 신자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경상원 조선인위령비(慶尚院 朝鮮人慰霊碑)

후쿠오카현 이이츠카시(福岡県 飯塚市)

 

주지이신 최경상 스님은 도자기를 조사하는 중에 석탄함에 버려진 조선인의 유골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후 이 유골들을 위령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기고 출가하였다고 한다. 그후 1973년 종교법인 경상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하였다.

 

경상원에는 1975년부터 치쿠호 지역의 탄광에 흩어져 있는 이름모를 조선인들의 유골이 모셔져 있으며, 또한 야마구치의 쵸세탄광에서 희생된 130명의 희생자 명부와 1940년부터 1942년까지의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 전국의 강제연행 관련 사망자의 이름, 사망한 날짜, 사고가 있은 기업, 가족 이름 등이 빠짐없이 적혀있는 명부, 노동자들의 미지급 임금 관련 자료 등 매우 귀중한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송암보제(松岩菩提)

후쿠오카현 쿠라테군(福岡県 鞍手郡)

 

이곳은 아마토 탄광의 노동자들의 공동묘지가 있던 곳으로 조선인 희생자들의 묘지도 함께 있었다 그러나 이 근처에 골프장을 건설하게 되면서 공동묘지가 미관상 좋지 않다고하여 근처에 있는 사찰에 임의로 유골을 봉안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이 1992년 답사를 왔던 시민단체에 의해 발견되었고 2년여에 걸친 투쟁을 벌여 추도시설 건립하여 230여 기의 유골을 봉안하였고 매년 9월 23일 추분의 날에 추도회 거행하고 있다.

 

 

상혼의비(翔魂の碑)

후쿠오카현 타가와시(福岡県 田川市)

 

이 비석은 강제연행 되어 온 탄광노동자들의 유골 약 600여기가 들판에 버려진 것을 안 한국 후쿠오카 청년회의소가 추도비 건립을 계획하였고 뜻있는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1999년에 건립하였다. 600여기 중에는 일본인도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매년 벚꽃이 필 무렵에 위령제를 거행하고 있다.

 

 

무궁화당(無窮花堂)

후쿠오카현 이이츠카시(福岡県 飯塚市)

 

전쟁 중, 조선에서 치쿠호 지방의 탄광에 강제연행된 사람들은 15만명을 이른다고 한다. 치쿠호는 일본 최대의 석탄광산이 몰려 있는 곳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시모노세키 상륙 후, 기차에 태워져, 이 일대의 탄광에서 노예노동을 강요당하였다. 이 지역에 동포의 땀과 피와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지 않는 장소는 없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무궁화당은 1943년 10월 전라남도에서 징용으로 이곳에 오게 된 배내선씨가 1986년부터 치쿠호지역 찾아다니며 조사를 하고 이이츠카시와의 끈질긴 교섭과 동포들과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2000년 12월 2일, 무궁화당을 완공하고 치쿠호 지방에 흩어져 있던 약140여 구의 유골을 모아 안치하였다.

 

 

한국조선인무연불의비(韓国朝鮮人無縁佛之碑)

효고현 아이오이시(兵庫相生市)

 

당시 아이오이 하리마조선소에는 2,000여명의 조선인이 일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조선반도 북부에서 강제연행된 사람들도 있었다.

 

1991년 젠코지에서 하리마조선소(현 이시가와지마하리마중공업 아이오이사업소)에 강제연행되어 사고 등으로 희생이 된 조선인의 유골 60여기가 발견되었다.

 

총련과 민단의 동포들이 협력해서 납골당 건립을 계획, 시에 협력을 의뢰했으며 모금운동을 진행했다. 그러나 1995년 1월 17일에 발생한 한신·아와지 대지진(고베지진)으로 사업이 잠시 중단되었으나 동포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95년 11월, 건립에 이르게 되고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 희생된 동포들의 유골과 함께 안치하였다.

 

 

조선인유골안치당(朝鮮人遺骨安置堂)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静岡県 静岡市)

 

시미즈 화장장에는 1965년 동포들에 의해 세워진 조선인 무연납골당이 있었으나 습기가 많은 곳에 위치한 탓에 유골이 상하는 등의 문제가 있어 민단과 총련의 요청으로 시미즈시가 1993년에 다시 세웠으며 90여구 유골이 모셔져 있다.

 

해방 전 시미즈에는 항만관련 시설, 군수공장, 항공대, 고사포 기지 등이 있었으며, 조선인이 많이 연행되어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현재 동포단체가 매년 추도회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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