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호추도비(浮島丸追悼碑)
쿄토부 마이즈루시(京都府 舞鶴市)
1945년 8월 24일 17시20분경, 쿄토부 마이즈루시 사바카 앞바다에서 해군특설 수송함 우카시마호가 의문의 폭발사고로 침몰하여 승무원 승객 549명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우카시마호에는 아오모리 지역의 조선인 노동자와 그 가족 3,735명이 타고, 부산으로 항해하다 진로를 변경해서 마이즈루로 향하던 중 재화를 만났다.
우카시마호 희생자의 유골은 마이즈루 히가시혼간지 별원에 모셔져 있다가 그 후에 지방복원부로 또 후생성 인양원호국에 이관되어졌으며, 사고 후 반세기 이상 경과한 지금도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유골 285기는 도쿄의 유텐지에 안치되어 있다.
1978년 뜻있는 일본인들의 노력에 의해 추도비가 침몰한 해안에 세워졌으며, 또한 그들의 목적지였던 부산에도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
한국인희생자위령탑(韓國人犧生者慰靈塔)
교토부 교토시(京都府 京都市)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기요미즈데라의 옆에는 료젠고코쿠진자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교토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으로 전쟁 희생자들의 무덤과 추모시설들이 있는 곳이다.
신사의 안쪽 가장 어두운 곳에 초라하게 조성된 동포들의 위령탑이 있다. 전쟁 중 일본군 특공대로 참전했던 이들의 묘이다. 일본인들의 경우 ‘누구누구의 묘’, ‘어느 부대원들의 묘’라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우리 동포들은 누구인지는 알 수 없고 합사의 형태로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일제시대 당시 교육은 일본 사람이라고 시키고 일본 사람으로 전쟁에 참가시켰으나 죽은 후의 대우는 너무나도 다르다. 이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단나터널순직비(丹那トンネル殉職碑)
시즈오카현 아타미시(静岡県 熱海市)
단나터널은 아타미역과 칸나미역을 연결하는 터널로 1918년 착공하였다. 연장 7,807m의 복선터널은 당시로서 일본 내 최장임은 물론 세기의 프로젝트라고 불릴 정도의 대공사였다. 공사가 난항을 거듭함에 따라 공사기간은 계획된 7년을 훨씬 초과하여 16년만인 1934년 완공을 보게 되었다. 현재에도 이 터널을 통해 철도가 왕래하고 있으며, 공사기간 동안에 연 인원 250만 명이 투입되었다.
조선인은 1920년대부터 단나터널 공사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공사장에는 다이나마이트와 낙반, 출수, 감전 등으로 인한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공사기간 동안 사고가 6건이나 발생하여 총 67명이 목숨을 잃고, 610명이 중상을 입었다.
1934년에 철도성은 터널 개통을 즈음하여 터널의 동쪽 입구 바로 위에 단나터널 공사 순직비를 세웠다. 여기에는 공사에서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조선인 노동자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매년 4월 첫째주 일요일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칸몬터널순직비(關門トンネル洵職碑)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山口県 下關市)
일본 혼슈와 규슈 사이에 있는 칸몬해협의 해저를 꿰뚫어 만든 철도 및 국도의 해저 터널로 전체길이 약 3,600m. 그 중 해저부분은 1,140m이다. 1936년에 착공하여 1944년에 개통한 것으로 일본 최초의 해저터널이며, 해저철도 터널로서도 세계 최초의 것이다.
이 공사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순직비가 터널 입구에 있으며 우리 동포들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
동남해지진희생자추도기념비(東南海震災犠牲者追悼記念碑)
아이치현 나고야시(愛知県 名古屋市)
동남해지진은 1944년 12월 7일에 미에현 시마반도 남동 약 20km 앞바다의 해저를 진원으로서 발생한 진도8.0의 대지진이었다.
지진에 의한 가옥의 파괴, 지진 후에 발생한 해일에 의해, 미에현, 아이치현, 시즈오카현을 중심으로 17,800명의 사망자·행방불명자를 냈다. 태평양 전쟁의 한창이던 시기여서 정보는 통제되었었고, 기록 자체가 소멸·유실되어 피해를 파악할 수 없는 지진이었다.
동남해지진희생자추도기념비는 닛신방적 나고야 공장 내에 세워져 있으며 비석에는 지진으로 희생당한 조선인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평화의비(平和の碑)
아이치현 나고야시(愛知県 名古屋市)
일본 중부지역에 위치한 나고야는 일찍이 군수공업이 발달했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나고야는 일본 유수의 군수공장들이 밀집한 거대한 군수공업도시로 변모하고 있었다.
1942년 4월 최초로 일본 본토를 공습한 미군은, 일본이 패전을 선언하기까지 주요도시에 무차별 폭격을 계속했다. 특히 미군은 1944년 12월 B29폭격기가 나고야 미쯔비시 발동기 제4공장을 집중 폭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1945년 7월 26일까지 총 56회에 걸쳐 2,025기의 전투기가 나고야에 출격해 도시를 완전 초토화시켰다.
이 기간 사망자만 8,630여명에 이르렀다. 아울러 부상자가 1만1,164명, 이재민 52만명에 이르는 등 나고야는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큰 피해를 입었다.
1995년 12월 전후 50주년을 맞아, 동방고교에서는 교정에 1944년 미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나고야 미쓰비시의 발동기 제작소 공장의 벽을 가져다 「평화의 비석」을 세웠다.
토요카와 공습희생자공양탑(豊川 空襲犠牲者供養塔)
아이치현 토요가와시(愛知県 豊川市)
토요카와 해군공장은 1939년 12월 중화기와 탄약을 제조할 목적으로 세워졌으며, 징용공원, 여자정신대원, 학도보국대원을 각지에서 동원해서 총원 56,700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7일 오전10시30분, 미국 공군의 폭격에 의해 한순간에 2,670명이 사망했으며, 광대한 공장도 폐쇄되었다.
1962년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 공양탑을 세우고 해마다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한다 전쟁희생자추도평화기념비(半田 戦争犠牲者追悼平和記念碑)
아이치현 한다시(愛知県 半田市)
1945년 7월 24일 오전 미군 제20항공군 소속의 B29폭격기가 한다시를 공격한다. 당시 한다시에는 나카지마 비행기공장이 있었으며 537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 공습으로 269명의 시민들이 희생당했다. 이 추도비에는 당시에 희생당한 일본인들과 강제연행으로 나카지마 비행기공장에 일하던 조선인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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