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가을 들판이다...
햇볕도 너무 좋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주고
걷기에 너무 좋은 곳이다...
연미정은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고종이 학생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부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후 조선 중종5년(1510) 삼포왜란 때 방어사가 되어 왜적을 무찌르고,
중종7년(1512) 순변사가 되어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황형에게 이 정자를 하사하였다 한다.
이 곳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줄기는 강화해협(염하강)으로 흘로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연미(燕尾亭)라 하였다 한다.
높은 석주 위에 세운 팔작집으로 영조 20년(1744) 중건, 고종 28년(1891) 중수 등 수차에 걸쳐 보수하였다.
조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시 이곳에서 청국과 강화조약(講和條約)을 체결 한 곳이기도 하다.
강 건너에 북녘땅이 보인다.
그런데 산에 나무가 하나도 없다...
남쪽 산은 푸르기만 한데 북쪽은 그렇지 않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풍경이다.
연미정을 돌아 마을로 발길을 옮기는데 어느집 마당에서 벼를 말리고 있다.
참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다.
물이 마시고 싶어 원래 갈려는 길로 안가고 마을로 들어왔는데 가게가 안보인다.
돌아갈 수도 없고 계속 걷는다.
그런데 동문까지 와서야 가게가 나온다....
동문은 시내다...
예정에 없던 남문 파안루까지 와버렸다.
갑곶성지
천주교인들에게 있어서 강화도는 또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신앙을 증거하기 위한 선배 신앙인들의 피어린 노력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다.
강화에서의 천주교 박해는 철종의 조모 송씨, 자부 신씨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하므로 시작된다.
강화도에 귀향살이 하던 조부 은언군마저 아들 상계군의 역모죄로 관청리 형방에서 처형되었다.
또한 신유박해의 순교자 황사영의 탄생지가 월곶리에 있다.
황사영은 백서( 帛書)를 써서 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다 발각되어 순교했다.
이렇게 강화도는 한국 천주교회와 인연을 갖게 된다.
병인년 10월 프랑스 선교사 리델이 통역 및 뱃길 안내자로서 처음 강화 땅을 밟았다.
프랑스군의 강화읍 점령과 정족산성 전투는 천주교회에 대한 대대적 박해로 이어진다.
1868년 강화에 살던 천주교 신자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 등이 갑곶나루에서 참수 되었고
그밖에 김포지방의 신자들도 강화에서 교수형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정확한 성지의 위치를 찾은 인천교구는 그 자리를 매입하여 지금의 갑곶돈대 순교성지를 조성하였다.
이후 2000년 집중적으로 개발하였고 2001년 순교자들의 유해를 성지 내에 안장하게 되었다.
천주교성지를 몇군데 가보았는데
천주교 신자가 아닌데도 마음을 가다듬게 만드는
가장 엄숙한 곳이었다.
갑곶성지를 나와 갑곶돈대로 가는 중에 조봉암선생 추모비를 발견했다.
조봉암선생이 강화출신이라는걸 처음 알았다.
한국의 진보인사를 대표하는 분인데 내가 너무 몰랐던거다...
갑곶돈대는 구강화대교 입구 부근으로 추정된다.
주변에 면석으로 추정되는 석재가 간간이 보인다.
이 돈대 하부는 암반으로 되어 있어 돈대 설치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북쪽으로는 갑곶나루가 위치하고 있어서
김포의 문수산성과 통할 수 있는 통로로서 활용되어 왔으나 현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남쪽으로는 강화역사관이 위치하고 있고, 국민의 국방교육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근데 볼건 없다...
전체거리 : 21.0km
전체시간 : 7시간4분
움직인시간 : 5시간33분
정지시간 : 1시간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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