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산 사진/2007_잊혀진이름

2007_잊혀진이름_10

이땅에 2009. 5. 24. 22:16

 

 

 

십자가의탑(十字架の塔)

후쿠오카현 온가군(福岡県 遠賀郡)

 

2차 대전 당시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지역에서 끌려와 미즈마키 타카마츠 탄광에서 일하다 희생당한 연합군 포로 노동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종전 후 전범 재판을 앞두고 조사위원회가 도착하기 직전에 급하게 세워졌다가 후에 1987년 4월 1일에 다시 세웠다.

 

이 탑에는 800여 명의 연합군 희생자 명단이 있다. 당시 그렇게도 발빠르게 외국인 희생자를 위한 추도비를 세웠던 일본은 정작 일본을 위해 일했던 수많은 조선인을 위한 배려는 아직도 외면하고 있다.

 

 

 

평화기념공원(平和記念公園) / 평화공원(平和公園)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広島県 広島市)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長崎県 長崎市)

 

1945년 8월 6일 오전8시15분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히로시마에 투하되었고, 사흘 후인 1945년 8월 9일 오전3시 무렵 나가사키에 ‘패트맨’이 투하되었다.

 

히로시마는 당시 서일본의 중심지로 총감부, 철도국, 체신국, 재무국, 전매국, 군수관리국 등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군 관련 인원만 약 9만명에 이르렀으며, 나가사키도 일본 제일의 군함제조를 자랑하는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와 병기공장들이 위치하고 있어 일찍부터 군수도시로 성장하였던 곳이다.

 

원폭 투하로 인해 히로시마에서 14만명, 나가사키에서는 7만명이 숨졌다. 부상 및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유전자 변형으로 대를 이어 고통당한 사람들 역시 수만명이 넘었다.

 

일격을 받은 일본은 8월 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고, 태평양 전쟁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피폭자는 각각 42만명과 27만명이었으며 그 중 피폭으로 사망한 사람은 각각 약 16만명과 약 7만4천명에 이른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추정에 따르면 당시 피폭을 당한 조선인은 히로시마 5만여명, 나가사키 2만여명에 이르며 이들 중 히로시마에서는 3만여명이 나가사키에서는 1만여명이 사망하였고, 종전과 해방 후 2만3천여명이 귀국하였다.

 

하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기념관은 ‘잊지 말자’는 각오만 있을 뿐 전쟁이 어떻게 기억되는가, 무엇을 기억시키고 있는가 하는 기억의 형태는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일본이 희생자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일본의 중국침략과 전쟁 동안의 조선인 연행 등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있다.

 

일본은 기억해야 한다. 진정한 평화는 과거에 대한 진정한 사죄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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